사람사는 이야기/오도재

사천의 역사적 고찰 (정유권 부시장 글)

오도재 2010. 1. 21. 10:45

泗川의 歷史的 考察



 

목    차

 

 

 

 

 

 

 

 Ⅰ. 사천의 개괄적 역사

 

 Ⅱ. 사천의 문화

 

    ○ 사천의 주요 문화유적

    ○ 사천이 낳은 대표시인 박재삼

    ○ 비토섬 별주부전 이야기

   

 Ⅲ. 사천팔경

 

    ① 창선․삼천포대교 ② 실안낙조 ③ 남일대 코끼리바위

    ④ 선진리성 벚꽃 ⑤ 와룡산 철쭉 ⑥ 봉명산 다솔사,

    ⑦ 사천읍성 명월 ⑧ 비토섬 갯벌

 

 Ⅳ. 대한민국 첨단 항공우주산업의 메카

 

책속의 사천 : 주강현의 觀海記

 


泗川의 歷史的 考察

 ○ 사천시는 경남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동남쪽은 고성군과 남해군을,  서북쪽은 진주시와 하동군을 경계로 하고 있음

 

 ○ 174.3㎞의 해안선을 따라 10개의 유인도와 35개의 무인도가 있으며, 맑고 깨끗한 청정지역으로 수산물의 집산지임

 

 ○ 사천만에 접하고 있는 산지는 동남쪽은 와룡산(798m), 홍무산(453m), 각산(398m)이 바다로 걸쳐있어 자연적 방파제 구실을 하고, 서북쪽은 미영산(570m), 송비산(243m)이 지리산 줄기로 형성되어 있음

 

 ○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지로서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공항, 항만, 고속도로 등 교통망이 잘 발달된 교통의 요충지임

 

 ○ 해양과 대륙성 기후가 혼합된 온난한 기후로 농수산업이 발달 하였으며, 세종과 단종의 태(胎)를 묻은 태실지가 있는 길지

 

 ○ 한국항공우주산업과 한국경남태양유전이 입주한 첨단항공산업 및 외국인 투자산업의 메카임

 

 ○ 대전~진주간 고속도로와 창선․삼천포대교 개통 이후 중부권의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으며, 사천시 서포면과 용현면을 연결하는 사천대교 개통으로 연간 200억원의 물류비 절감 및 지역간 화합과 갈등을 해소하였음

 

 ○ 또한, 항공우주엑스포, 세계타악축제, 전어축제, 삼천포대교 야경 축제 등 특색있는 축제 개최로 연간 600만명이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음

Ⅰ. 사천의 개괄적 역사


 ○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의 하나였고, 가야시대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에 속하였음


 ○ 신라시대에는 사물현 지역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사수현, 고려시대에 사주현, 조선시대에 사천현으로 불리었음


 ○ 1895년(고종 32년) 전국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 사천군이 되었다가 1912년 고성군 남양면을 편입하고, 다시 1914년 진주군의 축동면․부화곡면과 곤양군의 서면․금양면을 제외한 일원을 편입하였음


 ○ 1918년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을 설치하였고, 1931년 읍동면을 정동면으로, 읍서면을 사남면으로,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각각 개칭하였으며, 삼천포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음


 ○ 1956년 삼천포읍이 남양면과 통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하고 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음


 ○ 1983년 곤양면 가화리 일부를 진양군 내동면에 편입, 서포면 무고리, 맥사리를 곤양면에 편입하였고, 1988년 평화․선인․정의․수석․주동을 리(里)로 고쳤으며, 1990년 축동면 길평리 하동마을을 사남면 유천리로 편입하였음


 ○ 1995년 5월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면서 사천시로 개칭하였음


 ○ 1998년 대방동을 동서동으로, 동좌동을 선구동으로, 봉이동을 향촌동으로 통합하고, 남양 1․2동을 남양동으로 통합하였음

Ⅱ. 사천의 문화


□ 사천의 주요 문화유적


 ○ 사천매향비 : 보물 제614호, 곤양면 흥사리


   - 매향비란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비를 세워 두는 것임


   - 이 비는 고려 말 우왕(禑王)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당시 왜구의 발호가 극심하여 나라의 운명마저 불안해지자 승려 중심의 불교신자 4,100명이 향계(香契)를 맺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륵보살(彌勒菩薩)께 비옵니다”라는 뜻의 204자의 글을 새겨 놓았음


 ○ 다솔사 보안암석굴 : 도 유형문화재 제39호, 곤양면 무고리


   - 보안암(普安庵)은 다솔사(多率寺)에 딸린 암자로 일명 미륵암(彌勒庵) 이라고도 했으며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음


   - 현재 석굴 중앙에는 돌로 쪼아 만든 석가모니의 좌상(坐像)이 안치되어 있고, 좌상 뒤 좌우에는 아주 작은 돌로 쪼아 만든 16구(具)의 나한상(羅漢像)이 배치되어 있음


 ○ 사천향교 : 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사천읍 선인리


   - 사천향교는 사천읍 선인리 119번지 성전봉(聖殿峯) 기슭에 위치


   - 당초의 향교터는 지금의 정동면 풍정리에 있었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다만 옛날의 고현지(古縣址:옛 읍터)가 현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추정이 가능할 뿐임


 ○ 곤양향교 : 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곤양면 송전리


   - 곤양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므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개 곤양군이 세종 원년(1419)에 군으로 승격되었음을 상기할 때 향교도 세종시대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정

 ○ 삼천포 매향암각 : 도 유형문화재 제288호, 향촌동 산46-1


   - 조선 초기 태종 18년(1418)에 승려와 신도들이 이곳에 매향하고 그 내용을 암각한 것임


   - 그 당시는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 지방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보다 큰 불안이요, 현실적 위기감 이었다고 생각하였음


   - 따라서 매향지의 백성들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적 고통감과 불안감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미륵신앙과 접합된 종교의식으로서 매향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음


 ○ 세종대왕 태실지 : 도 기념물 제30호, 곤명면 은사리


   - 세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에 곤양군의 전신인      옛 곤명현(昆明縣) 소곡산이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吉地)라 하여 임금(세종)의 태를 이곳에 안치하였던 것임


   -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게 짓밟히는 불운을 겪어 임금의 태실이라 하여 온전할 수는 없었고, 선조(宣祖) 34년(1601) 3월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게 되었으며 영조 10년(1734)에는 태실비(胎室碑)를 세우고 [태실수개의궤(胎室修改儀軌):수리한 기록문서]를 남겼음


 ○ 단종 태실지 : 도 기념물 제31호, 곤명면 은사리


   - 단종태실지는 세종대왕이 임금자리에 오른지 23년(1441)에      그의 애손(愛孫)인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앞산에 태실을 안치(安置)토록 어명을 내려 곧 그해에 조영(造營)하였음


   - 임진란 때 왜적이 몰려와 규모가 큰 세종대왕의 태실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규모가 작은 단종 태실은 적의 눈길을 끌지 못하여 다행히도 화를 면했고, 영조 10년(1734) 세종대왕의 태실비를 세울 때 단종의 태실비도 이때 함께 세웠음

 ○ 신벽동 지석묘 : 도 기념물 제39호, 신벽동 494


   - 남양초등학교 북쪽편으로 군도 1호선의 동쪽 약 50m지점의 논밭 가운데 모두 7기(基)로 북두칠성의 형태로 놓여 있음


   - 지금까지 확인된 고인돌무덤은 모두 100여기나 되는데, 대개 사천 바다를 중심으로 동부 4개면과 남양동 지역에서 주로 발견됨


 ○ 덕곡리 지석묘 : 도 기념물 제49호, 용현면 덕곡리


   - 용현면 덕곡리 일대의 민가 근처와 농경지 등에 흩어져 있음


   - 이른바 ‘고인돌무덤’이라고 하는 이 지석묘는 모두 15기나 되며 이를 한데 묶어서 1979년 12월 29일 도 지정기념물로 지정하였음


 ○ 사천 조명군총 : 도 기념물 제80호, 용현면 선진리


   - 조명군총(朝明軍塚)은 조선조 선조(宣祖) 30년(1597) 1월에 왜적이 재침하여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 선진리성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임


 ○ 사천읍성 : 도 기념물 제144호, 사천읍 선인리


   - 사천읍성의 위치는 정의리 일부와 선인리 일부에 걸쳐 있으며, 현재의 산성공원 일대를 포함하는 전지역이 옛 읍성지(邑城址)임


   - 축성시기는 조선 세종(世宗) 24년(1442)에 병조참판(兵曹參判) 신인손(辛引孫)이 왕명에 의해 성을 쌓았으며, 이로부터 4년 뒤인 세종 27년(1445) 봄에 공청(公廳:공무를 보는 집) 등 모든 건물을 짓고 현기(縣基)를 정동 고읍에서 이곳으로 옮겼음


□ 사천이 낳은 대표시인 박재삼


 ○ 박재삼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를 썼고, 말소리와 말뜻을 조화시킨 오묘한 운율을 만들어 서민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했음


 ○ 그리고 광복과 한국전쟁기간 동안 우리 겨레 대부분이 경험해야 했던 경제적 빈곤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일상적인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누구나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는 시를 지었음


 ○ 또한 그 나름의 인생관으로 삶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시를 꾸준히 써 왔기에 그의 작품속에는 그만의 독특하고 깊은 시 세계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시 세계는 15권의 시집과 10권의 수필집 속에 잘 반영되어 있음


 ○ 박재삼은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자랐고, 삼천포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 사환으로 들어가 일하였는데, 이곳에서 교사이던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 시를 쓰기로 결심하였음


 ○ 그 뒤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음


 ○ 1953년《문예》에 시조〈강가에서〉를 추천받았고, 1955년《현대문학》에 詩〈섭리〈정적〉등이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1955∼1964년 월간 대문학사 기자를 거쳐 1965∼1968년 대한일보 기자, 1969∼1972년 삼성출판사 편집부장 등을 지냈음


 ○ 사천이 낳은 한국의 서정시인 박재삼은 고혈압과 심부전증으로 고생하다가 1997년 6월 8일 작고하였음


 ○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춘향이 마음》《천년의 바람》《뜨거운 달》, 수필집《아름다운 삶의 무늬》 등이 있음

박재삼 시인의 대표 詩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집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저거 봐, 저것 봐

       제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겠네

 

   ☞ 이 시의 화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붉은 놀이 지는 강물을 보게 된다. 강물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며, 그것은 울음의 길이었고 이제 놀이 지듯 자신의 삶도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말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삶의 서러움이며 한이다.

□ 비토섬 별주부전 이야기


 ○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 서포면 비토리 천황봉(비토섬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육지인 서포면 선전리 선창과 자혜리 돌 끝을 생활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꾀 많은 토끼부부가 있었습니다.

 

 ○ 이 토끼부부는 매일 아침 비토 천황봉에서 눈비비고 일어나면 바다건너 신선이 살고 있는 선창(仙倉)마을로 건너가 신선의 창고라 불리는 골짜기에서 온갖 기화요초와 함께 칡넝쿨 우거진 숲속에서 아침이슬과 각종 새싹들로 배불리 식사를 끝내고 큰들 안과 장대먼당(長竹峯)을 넘어 찔끔 자혜(自惠)를 돌아 돌끝 바닷가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보내고 해가 저물면 건너편 비토섬 월등도로 되돌아가곤 하였습니다. 

 

 ○ 토끼부부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봄날 저녁 돌끝 바닷가에서 남해바다 구경에 혼을 빼앗기고 있는 토끼부부에게 남해바다 용왕님의 사자인 별주부(거북)가 찾아 왔습니다.

 

 ○ 토끼부부를 찾아온 별주부는 토끼부부에게 남해바다의 궁궐인 용궁을 구경시켜주고 높은 벼슬도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속였습니다. 이에 속은 남편토끼는 임신한 아내 토끼를 남겨두고 별주부의 등에 타고 남해 바다 용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 용궁에 도착한 토선생 용궁에 와서 본즉 용왕님은 병들어 있고 용왕의 병에는 백약이 무효하고 오직 토끼의 생간이 신효하다는 의원의 처방에 따라 토선생을 잡아 왔노라는 말과 함께 자신을 죽여서 생간을 약으로 쓰겠다고 하니 망연자실 후회막급이라, 한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 좋은 묘안이 생각난 토끼는 웃는 얼굴로 용왕님께 말했습니다. “소생은 육지에 살고 있는 많은 짐승과는 매우 달라서 달과 함께 달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짐승인지라 한달 중 달이 커지고 있는 선보름 15일 동안은 소생의 간을 월등도 계수나무(해송)에 걸어두고 후보름 15일은 소생의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데, 후보름 15일간은 간이 커지는(자라는)기간이며 선보름 15일은 통풍이 잘 되는 소나무 그늘에서 음건하여 약효를 강화시키는 기간에 해당합니다.” 라고 말한 다음 "지금은 마침 선보름에 해당되는 음력 15일인지라 내가 살고 있는 비토섬 월등도 산중턱에 있는 바람 잘 통하고 그늘진 계수나무(해송)에 걸어두고 왔습니다. 

 ○ 제 목숨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수중국 만백성의 어버이신 용왕님의 병환에 약이 된다는 제 생간은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월등도 계수나무에 있으니, 이를 어쩝니까? 저기 있는 별주부가 육지 동물들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 있었다면 제(토끼)가 다른 짐승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일인데 아니 저 별주부가 용궁에 가자고 할때 용왕님의 병환을 나에게 진실 되게 말해 주었으면 용궁에 올 때 간을 가지고 들어올 것을... 오호통재라!" 하고 한탄하면서 억울해 했다.

 

 ○ 이를 본 용왕은 '아! 그래서 토끼의 생간이 그렇게도 신효한 약효가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고는 토끼에게 물었다. "토선생은 짐을 위해서 지금 육지에 가서 너의 간을 가져올 수 있느냐?" 토끼는 즉시 대답하기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와 저 별주부를 제가 살던 비토섬 월등도로 보내주시면 최상급의 생간을 용왕님을 위해서 특별히 선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 이를 보고 들은 용왕님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토끼를 속인 잘못을 정중히 사죄하고 즉시 별주부에게 명하여 토선생을 다시 육지로 모시고 가서 월등도 계수나무에 있는 토선생의 생간을 가져오라고 엄명하였다.

 

 ○ 이에 거북(별주부)은 토끼를 등에 태우고 다시 비토섬 월등도 부근에 당도하니 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달밤이었다. 월등도 앞바다에 당도하자마자 성급한 토끼 즉시 힘차게 월등도로 뛰어들었지만 달빛에 반사된 육지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 월등도 가까운 바닷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 바다에 빠진 토끼는 그 자리에서 죽어 토끼섬이 되었고 토끼를 놓친 거북이는 용왕으로부터 책임추궁과 벌을 받을 것을 걱정하여 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섬이 되었으니 바로 거북섬이며, 특히, 이곳 주민들은 월등도(月登島)를 돌당섬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토끼가 용궁에 잡혀간 후 돌아와 처음 당도한 곳이라는 뜻에서 돌아오다, 당도하다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돌당섬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 한편 남편을 용궁으로 떠나보낸 아내 토끼는 매일 자혜리 돌끝에서 남해바다를 바라보면서 목이 빠지게 남편 오기를 기다리다 바위 끝에서 떨어져 죽어 섬이 되었으니 바로 돌끝 앞에 있는 목섬이다. 목섬은 지금도 그때 죽은 아내 토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Ⅲ. 사천팔경


ꊱ 창선․삼천포대교


 ○ 사천시의 대방과 남해 창선을 연결하는 연륙교로서           2006년 건설교통부가 주관하고 한국도로교통협회에서 주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한려해상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사천의 명물


 ○ 특히, 야간에 푸른 바다와 조명이 멋들어진 조화를 이루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함


ꊲ 실안낙조(實安落照)


 ○ 해안에서 보는 바다와 섬을 건너 남해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은 일품이고 2000년 한국관광공사 선정 전국 9대 일몰의 하나임


 ○ 주변의 죽방렴은 사천의 대표적인 원시정치망 어업형태로 이곳에서 어획되는 멸치는 맛과 질이 우수하며, 부채꼴의 참나무 말뚝으로 만든 죽방렴과 섬, 바다 그리고 일몰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룸


남일대(南逸臺) 코끼리바위


 ○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께서 남녘 땅에서는 제일의 경치라고 하여 남일대라고 이름을 지었음


 ○ 코끼리가 물을 먹는 듯한 형상인 코끼리바위(象頭鼻岩)와 서부경남의 유일한 조개껍데기 모래의 해수욕장과 진널전망대는 여름철 많은 피서객의 휴양지가 되고 있으며 겨울바다 위를 수놓은 갈매기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음

ꊴ 선진리성 벚꽃


 ○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왜선 13척을 함몰시켜 승전을 거둔 곳


 ○ 인근에 조명군총 등 역사의 현장이 있으며, 성내 1천여 그루의 벚꽃이 만개하면 은백색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음


와룡산(臥龍山) 철쭉


 ○ 와룡산은 높고 낮은 봉우리가 아흔아홉 개로 형성되어 구구연화봉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기암괴석과 한려수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을 보기 위해 많은 등산객이 찾고 있음


 ○ 5월에 철쭉이 만개하면 온산이 진홍색으로 물드는 장관을 연출하고, 특히 와룡산은 상사바위(801.4m)와 민재봉(798m)의 정상에서 삼천포항의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보임


봉명산 다솔사(鳳鳴山 多率寺)


 ○ 군립공원 봉명산(해발408m)에 위치한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AD503년)에 창건한 고찰로서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임


 ○ 일제 때 한용운 선생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은신처이기도 하였고 대양루, 응진전, 극락전, 적멸보궁과 보안암석굴이 있어    등산 삼림욕 약수를 즐기려는 발길이 늘어나고 있음

ꊷ 사천읍성 명월(泗川邑城 明月)


 ○ 백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사천읍성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되고 있으며, 사천읍성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사천읍 경관과 달맞이가 아름다운 곳임


비토(飛兎)섬 갯벌


 ○ 비토섬에는 월등도, 토끼섬, 거북섬, 목섬이 있고 이는 토끼와 거북이 용왕이 등장하는 별주부전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임


 ○ 육지와 바다사이에 두 번씩 나타났다가 사라졌다하는 판이한      두 세계의 중간에 있는 갯벌은 육상과 해상의 생태계 완충작용과 연안 생태계 유지물로서 훌륭하게 보존되어 자연생태 체험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음













Ⅳ. 대한민국 첨단 항공우주산업의 메카


 ○ 최초의 국산항공기 부활호

 

   - 사천시는 1953년 최초의 국산항공기 부활호의 제작이 이루어진 대한민국 항공의 역사적인 장소

 

 ○ 항공산업단지 조성

 

   - 첨단과학과 미래 산업으로 대표되는 항공우주산업 육성을 위하여 사천 제1․2일반산업단지 내 33만㎡ 규모의 항공산업단지 조성

 

 ○ 민․관․군․학․산 인프라

 

   -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비롯하여 항공특성화 전문교육기관인 한국폴리텍 항공대학 등을 유치하여 항공전문 인적 자원 양성

 

   - 사천공항과 제3훈련비행단이 위치해 있어 명실공히 국내 유일한 첨단항공 우주산업의 메카로 자리 매김

 

   - 인근 진주시의 경상대학교 기계항공공학부, 항공기부품 기술연구소, 공군교육사령부와 공군기술고등학교 등이 위치

 

 ○ 항공우주축제 개최

 

   - 2004년부터 개최한 항공우주축제에 많은 관람객의 유치로 성공적인 항공우주축제 행사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사천시가 항공인프라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데 좋은 계기 마련


책 속의 사천


주강현의 觀海記

- 삼천포 원시어법 죽방렴 -

- 조선시대에도 바둑판처럼 널려 있던 죽방렴 -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은 경남 사천시 삼천포지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수년전 모 방송프로에서 이 발언을 입에 올렸다가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자기 터전을 나쁜 뜻으로 빗대는 것을 누가 좋아라 하겠는가.


  그런데 이 글에서만은 이 말을 꼭 써야겠다. 단, ‘삼천포로 빠져야 바다가 제대로 보인다.’로 고쳐 쓰겠다. 진주나들목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고성과 통영 방향이다. 삼천포로 가자면 ‘역시나’ 밑으로 빠져야 한다. 육로로는 막다른 길이다. 그래서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나왔음 직한데 막상 삼천포로 빠지면 정말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다. 같은 말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전혀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실감한다.


  얼마전까지 남해 읍내로 가자면 반드시 남해대교를 건너야 했다. 아니면 삼천포에서 철부선으로 늑도를 거쳐 창선교를 다시 건넜다. 번잡하게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여유있을 때나 가는 코스였다. 그런데 삼천포대교가 놓이면서 사정이 돌변했다. 예전의 ‘하동~남해대교’ 길목 못지않게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삼천포~남해’로 곧장 들어가는 길목이 각광을 받는다.


  삼천포는 사실 통영, 여수 등과 더불어 남해안 유수의 어항이다. 조선시대에도 번화한 포구였으며, 일제 때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조성돼 어업침탈이 본격화했던 곳이기도 하다. 삼천포 동금리(팔장포)의 에히메촌(愛媛村)이 바로 대표적인 일제 이주어촌이다. 에히메켄(愛媛縣)에서 정책적으로 1911년에 ‘식민지 어촌’을 삼천포 팔장포에 건설했던 것인데, 이주민들은 어업 이외에도 농업, 잡화상, 요리점 등에 종사하였다. 고등어잡이 건착망에 종사하면서, 일본 어업자본의 성공 이면에는 이러한 ‘식민지 착취’, 혹은 ‘식민지 자본축적’의 역사가 상존하는 셈이다. 일본인들이 주목할 만큼 삼천포는 뛰어난 어장이어다. 삼천포 어시장에 가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 삼천포로 빠져야 바다가 보인다


  더운 복중에 무슨 고기가 있을까 싶었는데, 고등어, 병어, 삼치, 새우, 오징어, 까치복, 참복, 상어, 갈치 등이 지천이다. 어판장의 활기가 퍼덕이는 멸치떼 같다. 아주머니들은 고등어를 선별, 얼음을 채워 포장하는 일에 여념이 없고, 장정들은 갓잡은 상어를 끌어 내놓는다. 리어카로 얼음과 고등어를 옮기는 짐꾼들도 대목 만난 듯 잰걸음들이다. 삼천포수협의 차윤원(55) 지도과장은 ‘삼천포항을 모르고 어찌 남해안 수산업을 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실제로 수협 직영 횟집에서 함어, 독가시고기, 제도가리 같은 낯선 이름의 자연산 회를 먹어 보니 자원 고갈시대에 아직도 이런 자연산이 남아 있음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삼천포에 온 목적은 죽방렴(竹防廉)을 살피기 위해서다. 삼천포는 죽방렴의 원조다. 어판장에서 벗어나 실안동에서 전마선을 탔다. 문야성(45)씨가 운영하는 죽방렴으로 가는 길, 싱싱한 멸치 냄새를 맡았는지 갈매기떼가 몰려들어 극성이다.


  둥근 발통을 조심스럽게 오른다. 양쪽 활가지로 갈라진 말목은 예전 통대나무에서 H빔이나 참나무 각목 따위로 교체되었다. 발통 안의 통그물을 빙빙 돌아가면서 끌어올린다. 그물에 붙은 멸치를 대나무로 툭툭 쳐가면서 떼내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멸치 못지않게 쓰레기도 많아 사둘로 연방 라면봉지나 스티로폼 폐물 등을 걷어내야 했다. 통그물이 동그랗게 조여지면서 마침내 멸치떼가 하얗게 발광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문씨는 멸치떼를 능숙하게 거둬 저장박스로 옮겼다.


  잡아온 멸치는 곧바로 가마솥에 삶은 뒤 그물을 펴고 노천에 펴말리면 하루만에 값비싼 ‘죽방렴 며루치’로 변신한다. 사실, 요새 죽방렴 멸치는 서민들이 넘볼 음식이 아니다. 흔하던 죽방멸치의 생산량이 줄어 있는 사람들이나 먹는 ‘호사품’이 되고 말았다. 2㎏짜리 특등품 한 상자에 30만원을 호가한다. 최근 7월 말에는 36만원까지 가격이 치솟기도 했단다. 경매가격이 그러니 실제 소비자 가격은 상상을 넘는다. 물론 중품은 7만∼8만원, 하품은 2만원까지 떨어지나, 그 정도 가격이라도 싼 것은 아니다. 죽방멸치가 점점 서민들의 식탁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위판된 죽방멸치는 서울의 유명 백화점 매장으로 직행한다.


  죽방렴은 하루에 두 번 물을 보는데, 당연히 사리물이 중요하다. 조업은 여섯물부터 열물 사이에 집중되며, 열두물부터 열다섯물, 그리고 첫물과 둘째물 때는 거의 조업이 이뤄지지 않는다. 조수간만때 조류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월간 노동시간이 길지는 않다. 대부분 6∼9월 여름이 제철이며,겨울에는 소출이 적어 조업을 하지 않는다.


● 있는 사람 밥상에나 오르는 ‘죽방렴 며루치’


  죽방렴도 거의 사라지고 없다. 목 좋은 죽방렴에서는 연간 기천만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지만 대부분은 천만원 언저리의 수입이 고작이다. 한가하게 방렴으로 뛰어들 물고기가 줄어든 탓이다. 죽방렴 멸치가 비싸다고 하지만 어민들의 수입은 “엔간한 직장생활보다 쪼메 낫다 ”는 수준이다.


  삼천포대교 공사 때, 죽방의 철거보상비는 대략 2억5000만∼3억원 수준이었다. 대를 이어 고기를 잡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생계 수단임을 감안하면 턱없는 보상이지만, 일견 죽방의 ‘자본주의적 가치’가 만만치 않음을 입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죽방멸치는 싱싱한 은빛이 차라리 눈부시다. 햇빛에 반사되는 그 은빛의 찬란함은 자연산 멸치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죽방렴에서 파닥거리는 멸치를 사둘로 건져내 차린 즉석 멸치회는 가히 일품이다. 비린 멸치가 그렇게 맛있는 회로 둔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 입맛이 얼마나 심각하게 통조림문화에 길들여져 왔는지를 금방 깨닫게 된다. 이런 단호한 선언도 가능하지 않겠는가.“죽방렴, 남해안이 살아있다는 마지막 자존심!”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를 세워 만든 일종의 물고기함정이다. 살발이라고도 부르는데,모두 어살(漁箭)에 속한다. ‘경상도 속찬지리지’(1469) 남해현조에 보면 ‘방전(防箭)에서 석수어, 홍어, 문어가 산출된다’고 적었다. 방전은 죽방렴의 다른 이름이다. 이쯤에서 죽방의 어로 원리를 살피고 가자.


  물살 빠르고 수심 낮은 곳에 V자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양날개를 설치하고, 가운데에 고기를 몰아넣는 둥근 임통을 설치한다. 날개는 참나무 장목으로 촘촘히 박고, 쪼갠 대나무발로 장막을 둘러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둥근 임통은 일종의 ‘연못’이다. 고기들이 이곳에 들어와 노닐다가 포획된다. 조류를 따라 흐르다 임통에 든 고기를 거둬들이는 원시적 어로방식.


  남해안 죽방렴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이는 담정 김려(1716∼1821)였다. 일찍이 인근 우해(진해)로 귀양와 자산어보와 쌍벽을 이루는 어보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남긴 김려의 눈길에 죽방렴이 빠질 수 없었다. 자산어보(1814)보다 11년이나 빠른 1801년에 이 탐구서가 완성되었으니, 한국 최초의 어보인 셈이다. 자산어보가 서남해를 중심으로 해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면, 우해이어보는 남해 중심의 또다른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양자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조선후기 어업 및 어류지의 복원에 한층 가깝게 다가설 수 있으리라. 불우했던 그는 이 어보를 통해 민중의 삶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그가 본 죽방렴은 진해 인근의 것으로, 당시에는 어뢰(魚牢)라고 불렀다. ‘뢰’는 감옥이란 뜻이니, 고기가 대나무발에 잡힌다는 의미이다. 진해 바닷가에 수십개의 어뢰가 마치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죽방렴 풍경과 크게 다를 게 없다.


● 남중국·태국서도 성행 세계적 어법


  김려가 본 죽방렴과 현존 죽방렴이 원리나 기능은 같을지 몰라도 형태의 변형이 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일본식 죽방렴의 영향도 없지 않았겠지만, 죽방렴이란 이름도 20세기에 만들어졌다. 이 죽방렴이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멀리 남중국이나 태국처럼 대나무가 흔한 곳에서는 보편적으로 행해진 세계적 어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죽방렴이 가장 성행한 곳은 바로 삼천포와 사천교 인근 사천만, 창선교 주변의 남해 지족해협 등 세 군데를 꼽을 수 있다.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천혜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다. 죽방은 조류를 타고 떠들어오는 멸치를 잡는 어법이어서 이 멸치를 노리는 갈치 숭어, 전어, 농어와 새우도 제법 잡혔다. 삼천포항에서 경매되는 멸치 총량은 연간 260억원 규모로 무려 120만 관에 이른다. 삼천포의 멸치는 정치망이나 죽방렴으로 잡기 때문에 선도가 으뜸이다.


  그러나 아무도 삼천포 죽방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7∼8년 전부터 멸치 어획량이 급감하고 있어서다. 연륙교의 교각이 조류 흐름을 막아서 뜬물에 흘러다니는 멸치이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공사가 진행중인 사천대교의 홈통도 조류를 방해하기는 마찬가지다.


● 교각이 조류흐름 막아 어획량 급감


  삼천포에는 실안동 9개, 늑도 2개, 마도 5개, 신수도 3개, 대방동 2개 등 모두 21개의 죽방렴이 우리 전통어법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다행히 어항 삼천포의 자존심을 지킬 죽방렴이 다리 건너 남해군 지족해협에도 있다. 남해와 창선도를 연결하는 창선교에서 물길을 바라보노라면 죽방렴 20여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걸 바라보면서 제발 오래오래 지켜내 주기를 기대해본다.


  죽방렴이 전통적인 어로의 현장이지만 외지인들에게는 또한 그만인 구경거리다. 삼천포 시내가 바라보이는 돗섬 앞에 설치된 돗섬발의 일몰은 풍광이 뛰어나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의 눈길을 끈다. 지족해협의 창선교에서 본 돗섬발 일몰도 이에 못지않다.


  사람들은 그저 불탑이나 불상, 향교나 금석문, 그도 아니면 음풍농월이 질펀한 경관에만 관심을 쏟을 뿐,정작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어로현장에서 창조해 낸 생산문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귀족중심, 사대부중심, 육지중심 등의 일방적 편향이 가져온 후과이니, 지금껏 문화를 바라보는 수준과 취향이 제한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죽방렴이 얼마나 유서깊은 어업문화사의 자취인가.



주강현 : 문학박사(경희대), 문화재박사 수료(고려대), 한국민속연구소장, 해양문화재단 이사, 통일문화학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