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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구웰공원과 파밀리아 성당

오도재 2014. 4. 4. 16:20

구웰공원에 대한 자료 : 인터넷에서 퍼옴

1878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산 하이메 광장 근처 건물 4층에 개인 사무실을 열고 건축세계를 향해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가우디는 작은 소품에서 가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독특한 예술 혼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가우디의 작업은 결코 건축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디자인 형식 또한 하나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진행되었다.가우디는 개인 명함과 자신이 사용할 작업용 책상을 직접 디자인했는데, 명함이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스타일의 감각적인 취향을 가졌다면, 책상은 타라고나 평원에서 서식하는 곤충과 새들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조각품과 유사했다. 장식 속의 뱀, 덫에 걸린 새, 다람쥐, 도마뱀, 나비, 덩굴손과 월계수 가지 등은 가우디의 세심한 손길을 통해 금속 생명체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상은 가우디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이 스페인, 아니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그 책상을 통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은 최대의 기회, 즉 영원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구엘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878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가우디가 설계한 곤잘로 코메야(Gonzalo Comella)의 장갑 진열대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구엘은 우연히 들른 에두아르도 푼티의 작업장에서 가우디의 책상을 본 후 그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확신하게 된다. 이 후 구엘은 성당에 어울리는 가구의 디자인을 돈 많은 후작 등에게 주선해주는 등 여러 방면으로 가우디의 작품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둘 사이의 진한 우정도 시작되었다.에우세비 구엘 바시갈루피(Eusebi Güell Bacigalupi)는 가우디보다 여섯 살 연상의 벽돌 제조업자로서 남작의 작위까지 받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푼티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진 갑부 구엘과 예술가 가우디의 각별한 관계는 1918년 구엘이 죽기까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구엘과 가우디의 관계는 고객과 건축가 혹은 후원자와 예술가의 관계 그 이상으로, 어쩌면 예술에 대한 공통된 사명감으로 맺어진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르네상스시대 메디치(Medici) 같은 재력가 집안에 의해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처럼 예술적 안목과 재능을 겸비한 재력가 구엘은 자신의 열정을 가우디를 통해 불태웠던 것이다.1883년 구엘 가문의 건축가로 임명된 가우디는 구엘과 그의 집안을 위해 35년간 일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가우디는 「구엘 궁전 Palacio Güell」과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납골당 Cripta Colonia Güell」「구엘 공원 Park Güell」「가라프의 구엘 포도주 저장고 Bodegas Güell」 등 구엘 가문에 속한 모든 건축에 참여했다. 1910년 파리의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구엘이 자신의 비용으로 '가우디 전시회'를 개최할 만큼 그에 대한 믿음은 대단한 것이었으며, 가우디의 완벽한 후원자로서 변치 않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오랜 친구는 서로 닮는다 했던가? 구엘은 점차 가우디의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닮아갔다. 그래서 작업을 추진함에 있어 수익은 개의치 않고 가우디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고, 「구엘 공원」을 건설할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구엘과 가우디를 공동작가라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1918년 에우세비오 구엘은 절친한 친구 가우디와 함께 만들고, 또 살았던 「구엘 공원」에서 눈을 감았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가우디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 맞는 죽음이었기에 구엘은 결코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우디는 구엘을 '문예부흥시대의 왕자'라고 지칭하며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구엘은 진정한 신사다. 돈을 가지고 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돈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구엘이야말로 진정한 세뇨르(senyor)이다……진정한 귀족은 감각이 뛰어나며 예의가 바르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기에 부러움을 모르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찬찬히 관망한다. 바로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이렇지 않았는가?

이제 가우디의 작품세계를 형성했던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다. 가우디는 격동하는 세계의 분위기 속에서 카탈루냐의 정신을 이어받아 카탈루냐의 후예가 가진 감각과 방식을 표현하려 한 건축가였고, 그런 그에게 표현의 풍부함을 제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과연 가우디의 건축작품 속에 내재된 '자연의 언어'는 무엇일까? 이제부터 귀 기울여 보도록 하자.

 

 

점심먹고나서 가우디가 지었다는 구웰공원에 왔습니다. 구웰공원에 대한 설명은 위에 인터넷 자료를 읽어 보시고 ..... 귀찮으면 말고 ㅋㅋ

 

 

 

 

 

 

 

 

 

구웰공원에서 바라론 바로셀로나 시가지 전경

 

 

 

100년전에 친환경적인 공원을 조성할것이란 아이디어 신선합니다.

 

 

 

 

 

 

 

 

가우디가 깨진 도자기나 또는 멀쩡헌 도자기를 깨서 붙였다는 조각품

 

 

 

 

 

 

 

 

오른쪽 건물은 구웰공원 분양사무소 왼쪽은 수위실이였다나 어쨌다나   구웰공원은 원래 가우디의 친구인 구웰이 부탁하여 교외에 전원 주택단지 개념을 개발하다가 여러 사유로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이름만은 구웰로하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부하여 입장료를 받아 관리하고 있답니다.

 

 

 

 

 

 

 

 

 

 

 

 

 

 

 

 

 

 

 

 

분수대 - 이여인은 누구십니까? 나도 모릅니다.